감상론
추상적인 감각과 감상을 객관적인 지표로 분석해보자는 시도가 취미생활에 반영되기 시작하고서, 이 행위 자체가 갖는 의미나 의의, 그리고 그 행동과 동기에 정말 재즈나 미술이나 향수에 대한 애정만이 있는지, 그게 아니라면 어느 정도의 지적 허영심이 개입했는지가 곁가지의 고민으로 커진다. 먼저 감상의 객관화가 가지는 의의에 대해서는 나름의 결론을 내었는데, 생각과 말로써 둥글게 정리되지는 않았다. 간단한 문장으로 ‘이런 이유와 의의가 있다'라고 말하기는 좀 어렵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내린 나름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무언가를 감상하는 과정은 크게 두 과정으로 나누어진다.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과정(감각), 그리고 평가(생각). 받아들이는 과정은 전부 감각에 의존하므로 추상적이고, 평가는 개인적인 취향과 경험이 지배적으로 주관적이다. 따라서 감상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일이다. 여기서 감상자가 감상을 하는 가장 큰 이유를 짚어봐야 하는데, 감상 자체를 목표로 두고 있는 감상자라면 매 감상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다음 작품을 찾기 위한 유의미한 경험과 거름이 된다는 바로 그 사실이 감상의 가장 큰 주안점이며 이유가 될 것이다. 이번에 접한 작품이 좋았다면 좋게 다가온 개인적인 이유를 알아야지만 다음 작품의 키워드로 삼을 수 있고, 좋지 않았다면 좋지 않았던 개인적인 이유를 찾아야지만 이후에 비슷한 시도를 걸러내기 위한 키워드로 삼아 발전을 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방금 짚었듯이, 감상이라는 것은 지표나 키워드와 같은 객관성과는 아주 먼 거리에 있는 일이다. 이 간극이 감상자의 몫으로 남는다. 감상자의 숙제는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감상에 그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를 분석적으로 찾는 것이다. 따라서 감상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필요한 주관적이며 객관적인 잣대가 필요하고, 그 잣대를 이용한 분석이 필수적이다. 그 잣대라는 것은 먼저 감상 장르에 맞는 지식이 된다. 입맛이라는 잣대 또한 주관적이며 객관적인 잣대가 되는데, 이는 마지막에야 대 볼 잣대다.
예를 들어 재즈를 듣는다면 4/4박자의 기본 드럼 비트가 보통 이렇기 때문에, 지금 듣는 비트는 4/4박자의 변형이구나, 그럼 한 마디의 길이를 알 수 있고, 8마디나 12마디짜리 주제부를 알 수 있고, 그런 일련의 정보가 재즈를 감상하는 감상법에 하나의 가닥을 제공한다. 미술의 경우에는 어떤 컨템포러리 아트를 알기 위해서는 그에 영향을 준 모더니즘 사조를 알아야 하고, 그림의 속도감, 입체감이 물감의 종류와 붓질의 방식에서 나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작품을 만드는 이론과 작품들에 얽힌 이야기, 그 분야의 역사를 아는 것은 감상의 폭과 깊이 모두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그렇다면 오롯이 감상을 하는 감상자의 입장에서 어떤 공부를 어느 범위까지 하는 것이 도움이 되며, 또한 그 많은 이론들 중에 무엇부터 공부하는 것이 옳을까? 재즈의 이론을 공부하는 데에 피아노가 없어도, 미술을 공부하는 데 연필이 없어도 괜찮을까?
사실 그 질문은 피아노로 재즈를 공부 했고, 연필로 미술을 공부한 사람만이 답해줄 수 있다. 그런 사람들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고, 훨씬 높은 수준의 이해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도 제작자가 되어야 한다. 혹은 작품과 관객 사이에 교량 역할을 해 줄 '제작 경험자'가 필요하다. 다방면의, 높은 수준의 감상을 위한 제작자의 감상자용 매뉴얼 북이 필요한 것이다.
취미의 종류는 점점 다양해지고, 감상이 취미에서 가지는 지분은 실로 높다. 명상을 제외한 모든 취미는 오감을 주체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오감을 통해서 결과를 만들고 피드백이 이루어지는 필수적인 과정들은 취미의 모든 분야에 감상이 끼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취미는 다양해지는데, 또한 깊어지기도 하는가. 취미에 공부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에게 약간의 부담을 주는 것 같다. 이런저런 공방에서 간단하게 만들어 보면서, 원리나 역사나 이야기는 모른 채 현상에 집중하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물론 여러 취미에 대한 시도와 경험이 항상 나쁘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다만 취미에 큰 무게와 깊이를 두고 취미에 파고든 결과가 얕은 경험의 반복이라면 참 아쉬운 일이라는 얘기다. 이런 경우라면, 취미를 더 확장시킬 방법을 접하지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아예 이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다. '재즈를 듣기 위해서는 스탠다드 재즈부터 공부해 봐야겠구나', '즉흥적으로 어울리는 화음을 어떻게 넣는지 이해하려면 재즈 화성학을 공부해 보아야겠다'. 그리고 명반이 주는 놀라움과 감상의 과정은 훨씬 더 거대해진다. 반대로 취미에 큰 무게와 깊이를 두고도 시간을 많이 내지 못하는 감상자들이 있다. 감상을 위한 지식을 익히려면 당장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 더 깊은 지식을 위한 기본적인 지식들이나, 당장 눈 앞의 작품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길고 방대한 역사들을 공부해야 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이런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공부 들은 결국 당장 눈 앞의 작품에 대한 해석을 극대화해주는 것보다는 앞으로의 여러 감상들에 대한 해석 가능성들을 제공해 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감상에 필요한 공부가 어떤 기능을 하기 시작하려면 먼저 공부의 양이 꽤 쌓여야만 한다. 무언가를 뿌리부터 공부하는 것은 결코 빠르게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고작 잔뿌리에서 뿌리까지밖에 가지 못하는 적은 양의 공부는 크게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다가 맛있는 돈까스를 만드는 것과 같이, 공부에는 분명 튀기는 중간에 바람이 통할 시간 또한 필요하다. 지식의 습득, 그에 관련된 경험, 지식이 깊이 스며들 여유를 주는 휴식. 이런 노출과 복습과 휴식의 과정을 통해 지식이 깊이 스며들어야만 감상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지식이 배어 나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어떤 공부를 먼저 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아무런 공부나 일단 해보는 수밖에 없다. 시행착오까지 필요하다.
이렇게 수준 높은 감상을 위한 준비를 한다는 것은 분명 어렵고 복잡하며 품이 드는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취미에 깊게 파고들고 싶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정작 그런 감상자들은 감상의 방법을 모르거나 혼자서 부딪힐 시간이 없어 감상의 한계를 공방과 겉핥기로 정해놓고 아쉬워하고 있다면, 다시 한 번 - 그런 진심인 감상자들을 위해 감상의 매뉴얼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적 허영심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하지 않겠다.
글 전체적으로 감상자로서 가져야 하는 지식과 태도에 대한 이야기만 주욱 늘어졌지만 어쨌든 나는 내 관심 분야에 정직하고 깊숙한 태도를 가지고 싶다는 점과, 그 완전한 결과를 기대하는 이유가 예쁜 것에 대한 감상력 자체에 있는지, 지적 허영심에 있는지와 상관없이 그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스스로 많은 공부와 높은 수준의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확고히 했다. 나름의 감상론이다.
그리고 새로운 질문도 생겼다. 지금은 단순한 관심과 취미로 감상을 대했지만, 감상이 직업이 된다면 사람들이 감상자에게 원하는 정보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