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창작물, 감상에 관한 비평과
창작자를 발굴하고 알리는 일에 대한 편집자의 마음가짐에 대하여
특히 창작물 = 예술을 단순 고처로 생각하여 너무 숭배하지 않고 다만 감상하는 일에 창작과 동등한 중요도를 아는 마음가짐에 집중.
전문에서 창작과 감상에 관한 부분을 골라냈습니다.
글 전체에서 작가가 가지는 입장을 건드리지 않도록 노력했으나 더욱 깊이 이해하고 싶으신 분은 전문을 찾아 읽으시길 추천드립니다.
『시문학 창간에 대하야』
이번에 시문학이라는 격월간의 잡지를 정인보, 변영로, 김윤식, 정지용, 이하윤, 박용철이 편집동인으로 발행하게 되어 이제 겨우 창간호가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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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면 다 감격할 수 있는 작품이 있다면 누가 그 앞에 이마를 숙이지 않으랴. 그러한 작품을 알아보는 눈이 있다면 누가 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으랴. 허나 예술의 끼치는 힘을 과대시하는 것은 의심스러운 일이다.
현재 인식의 주체란 지나간 인식의 내부 기억의 총화성인 한 전일체이며 한 개의 존재에 대한 개인의 인상은 제각기 상이한 것이나 그 상이한 가운데의 공통성이 우리의 공통 감상의 기초가 되는 것이니 이 공통성의 규정이 없다면 비평은 성립 불가능이 될 것이다. 비평은 자기를 감수공통성의 한 표준으로 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중략)
시라는 것은 시인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한낱 존재이다. 조각과 회화가 한 개의 존재인 것과 꼭 같이 시나 음악도 한낱 존재이다. 우리가 거기에서 받은 인상은 혹은 비애, 환희, 우수 혹은 평온, 명정, 혹은 격렬, 숭엄 등 진실로 추상적 형용사로는 다 형용할 수 없는 그 자체 수 대로의 무한수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방향이든 시란 한낱 고처이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흘러내려 온다. 시의 심경은 우리 일상생활의 수평 정서보다 더 고상하거나 더 우아하거나 더 섬세하거나 더 장대하거나 더 격월하거나 어떻든 [더]를 요구한다. 거기서 우리에게까지 <무엇>이 흘러 <내려와>야만 한다 (그 <무엇>까지를 세밀하게 규정하려면 다만 편협에 빠지고 말 뿐이나) 우리 평상인보다 남달리 고귀하고 예민한 심경이 더욱이 어떠한 순간에 감득한 희귀한 심경을 표현시킨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흘려주는 자양이 되는 좋은 시일 것이니 여기에 감상이 창작에서 내리지 않는 중요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중략)
우리는 우리의 걸음을 조용 더듬더듬 걸어가려 한다. 북을 치고 나팔을 불어 한때 세상을 시끄럽게 하다가 사라져버리는 것이 되지 않고 우리의 나이를 해로 세이려 한다.
우리는 무서운 길을 걸으며 그 무서움을 헐기 위하여 무단히 고함치는 버릇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 더듬더듬 하는 말이 가장 자신있는 말이요, 더듬더듬 걷는 걸음이 가장 자신있는 걸음일 때가 있다.
(경성 옥천동 16 시문학사 발행) (소화 5년, 3,2, 조선일보소재)
‘시문학 창간호’ 중에서, <시문학 창간에 대하야>
박용철, 『효과주의적 비평 논강』, (1931) (0) | 2020.1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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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론 (0) | 2020.09.23 |